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이시 타츠야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어린 시절 고향이 시골이라 방송에서는 옛날 애니, 영화 같은 거만 잔뜩 틀어주어서 그런 걸 보고 자랐다고 한다. 처음으로 "이건 뭔가 대단하다." 라고 생각한 건 [[울트라맨(1966)|울트라맨]]의 [[짓소지 아키오]] 감독편이었다고 한다. 영화 감독 중에서는 [[안드레이 타르콥스키]], [[데이비드 린치]]를 존경한다고 한다. 특이해서 보기만 해도 재밌는 영상의 작품을 선호했다고 한다. 이렇게 남들은 잘 모르는 특이한 작품을 많이 접했지만 연출을 할 생각은 없었고 애니메이터를 목표로 했다. [[카나다 요시노리]]를 존경했으며 [[가이낙스]]에서 활동했다. 의외로 작화 시절엔 메카 작화 전문 애니메이터였다. 카나다 같은 로봇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. 그 외에도 [[톰과 제리]], [[루니 툰]] 같은 고전 미국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그런 것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. 2001년의 [[사이보그 009]]로 연출가로 데뷔했는데 그것도 일정 문제로 부득이 한 것이었다고 한다. 콘티를 빨리 그리면 작화에 투자할 시간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콘티 그리는데 시간이 더 걸려서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한다. 오이시가 연출한 사이보그 009의 에피소드는 사이보그 009 2번째 작품의 오프닝을 작화한 [[카나다 요시노리]]에 대한 오마주가 많다. 이후 다시 시도한 [[철인 28호]]([[이마가와 야스히로]]판)의 연출은 일부러 원작자 [[요코야마 미츠테루]]를 의식하고 고전 애니메이션, 고전 영화에 가까운 연출을 했으며 캐릭터 디자인을 무시하고 작화를 했는데 방영 당시 반응이 굉장히 안 좋아 해당 에피소드의 하청을 담당한 [[샤프트(기업)|샤프트]]에서 쫓겨나게 되었다고 한다. 이때 자신은 연출은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작화 애니메이터를 했다. 다만 이때 훗날의 작화 페르소나 [[모리오카 히데유키]]를 알게 되었고 이 에피소드는 훗날 명작으로 재조명을 받았다. 애니메이터 시절 [[유유백서/애니메이션|유유백서]]를 할 때 [[신보 아키유키]]를 만나서 알고 있었다. 샤프트에서는 오이시를 싫어했는데 샤프트에서 다시 불러서 무슨 일인가 하고 가보니 신보가 회사를 장악하고 있더라고 한다. 신보는 오이시가 사이보그 009와 [[철인 28호]]에서 한 연출을 보았는지 대뜸 "넌 작화말고 연출을 해라." 라고 권유했다고 한다. 초기에는 샤프트에서 [[파니포니 대쉬]], [[안녕 절망선생(애니메이션 1기)|안녕 절망선생]] 등의 오프닝 연출과 일부 각 화의 콘티나 연출을 주로 다루다 [[바케모노가타리]]에서 시리즈 디렉터를 맡게 된다. 평론가 [[오구로 유이치로]]가 오이시의 실력을 칭찬하기도 했다.[* 이때 둘이 사진을 같이 찍어서 [[양덕후]] 커뮤니티에서는 오구로의 사진이 오이시 타츠야의 사진으로 돌아다니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. 이 항목의 사진이 그때 찍은 사진으로 저 사진 옆에는 오구로도 있다.] 2009년 바케모노가타리를 마지막으로, 정확히는 MAG・넷 ~만화 · 애니메이션 · 게임의 현장~의 오프닝애니메이션(2010년)을 마지막으로 전혀 소식이 없었기 때문에 팬들 중에선 사망설(...)까지 돌았지만, 2016년 [[키즈모노가타리]]에서 6년 만에 복귀하게 된다. 그런데 또 소식이 사라졌다. 2021년 모리오카 히데유키 트위터에 따르면 디자인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.[* 사실 연출가나 애니메이터가 소식이 사라진 동안 다른 일을 하는 건 흔한 일이다.. 애니메이션 업계는 인력 유출을 두려워해서 게임이나 파칭코, 만화, 디자인 등 다른 업계 일을 받아서 하면 그런 일 하지 말라고 [[이지메]]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때는 필명으로 몰래 하는 사람들이 많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